즐겁고 안전한 산행과 나들이~

1021 백화산1063.5고지에서....

감칠맛.오늘 2007. 10. 23. 00:42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행록 권 4 편 추소설(秋蘇說) -백화산기(白華山記)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만부(李萬敷·1664-1732),

그는 백화산과 그 주변 명소들의 기행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쓴 지리지(地理誌)적 성격의 기행문집인 지행록(地行錄)에 실려 있는

‘추소설(秋蘇說)’이란 제목의 글에는 백화산에 대한 여러 사실적 기록이 포함돼 있는데,

그중 백화산 주봉인 포성봉(捕城峰·933m)에 대한 기록이 주목할 만하다.

 이 글을 보면 이만부는 반야사에서 하룻밤 자고 나서 백화산정에 오른 뒤

 ‘이 암자의 뒷산을 한성봉이라 부르며

이곳이 백화산의 제일봉(庵之負曰漢城峰乃白華第一頭也)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현 포성봉의 원명은 한성봉(漢城峰)이다.
 

 한국의 여러 명산에 대해 탁월한 글을 남긴

고 김장호 박사는 포성봉(捕城峰)이란 지명에 대해

‘일본에서 발행되는 조선학보에 실린 조선성곽일람 경상남북도편이

상주군 모동면 수봉리에 포성산성(城山城)을 기명하고 있으며, 

지금 지도상의 포성봉이란 산 이름이 바로 이 산성이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제 때 이름이 바뀐 것이니 한성봉(漢城峰)이란 원명을 찾아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성봉(捕城峰)은 일제때 우리나라의 국운을 꺾을 목적으로 금돌성을 포획한다는 뜻에서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임금 왕(王)이 들어간 산 이름을 왕산(旺山)으로 고친다거나

   (상주왕산)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오른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의 손자요,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박천(博泉) 이옥(李沃)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학문에 열중하다가 34세 때 경상도 상주 외답으로 낙향하여

69세로 별세할 때까지 처사(處士)로 살았다.


이관징, 이옥에 이어 문장에 능하며, 글에 있어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 또한 능하였는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와 종정체(鐘鼎體)를 잘 썼다고 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식산문집(息山文集)에 그가 찬한 식산의 행장(行狀)에서

"타고난 자태는 티 없이 아름답고, 피부는 얼음과 눈과 같이 맑고,

빛나는 눈빛은 밝은 별과 같았으며, 의지와 취향은 굳세고 깨끗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동은 단정하고 아담하여 군자(君子)로서의 재능과 덕을 겸비하여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이라고들 하였다"고

또 "처사(處士)로서 완명(完名)하였고,

오학(吾學)의 종장(宗匠)이었다"고 찬양하였다.


식산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다방면에서 많은 유고(遺稿)를 남겼다.

식산문집(息山文集) 38권(原集 22권, 續集 10권, 別集 4권, 附錄 2권),

도동편(道東編) 20권(2권 失傳), 역통(易統) 8권, 예기상절(禮記詳節) 30권,

사서강목(四書講目) 7권, 지서(志書) 15권, 역대상편람(易大象便覽) 2권,

태학성전(太學成典) 13권, 노여록(魯餘錄) 1권, 독서법(讀書法) 2권(상, 하권),

독서일기(讀書日記) 1권, 규훈(閨訓) 2권(한글본 상,하권, 失傳), 잡록(雜錄) 1책

계 140권에 이른다.


식산문집 4권은 우리나라 전국의 명승고적지(名勝古蹟地)와 명산(名山)을

거의 답사하고 가는 곳마다 지리지적(地理誌的) 성격의 기행문(紀行文)과 시(詩)를 모아

4권 11록과 부록으로 편성하여「지행록(地行錄)」 이라 하였다.



  "포성봉(捕城峰)아닌 한성봉(漢城峰)으로 바꿔야"

   <지행록>에 전하는 백화산

지행록에 보면, 식산 이만부는 반야사에서 하루밤 자고 나서 백화산에 올랐다.

그는 '화령, 중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신덕에 이르러 옥봉과 부딪치면서 뫼뿌리를 안고…….' 라 했으니 현재 백화산 남동쪽 들목인 수봉리 신덕 마을 앞의 백옥정이

선 봉우리가 바로 옥봉이 될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몇 리를 더 가서 북으로 올라 진불암을 들른 뒤 옛 성터와 석문을 지났는데, '이 성을 방군성이라 부르며 여기서 서쪽으로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가니 보문암이 있었다' 고 적었다.

그러나 '진불암에서 내려오면 개울이 되고 올라가면 다시 높은 산마루를 이루는 곳'

이라고 애매하게 적어, 그 유적들의 명확한 위치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서쪽 우거진 숲속으로 가보니 보문암…….'

이란 기록으로 미루어 현재 작은 창고 석문도 남아 있는 대궐 터였을 확률이 높다.

그는 '이 암자의 뒷산을 한성봉이라 부르며 이곳이 곧 백화산 제일봉' 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포성봉은 원래 이름이 한성봉이었던 것이

훗날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산성의 이름은 원래 금돌성임을 삼국사기가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후대에 방군성으로 이름이 바뀐 것일까.

그는 신라 악사 임천석의 전설과 임천석대의 위치레 대해서도 언급했으나 '

우동이하입곡계상유첩석...(又東而下入谷溪上有疊石)' 이라 적어,

한성봉의 동쪽이란 뜻인지 진불암의 동쪽이란 뜻인지 명확치 않다.



작지만 백화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백화산은 그 흐름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산줄기와는 다르고 비래산처럼 동떨어져 있는 산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머리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 두역산(頭逆山) 이라 하기도 했다한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옛 이름이 두역인데

그 이름이 점잖지 못하여 백화산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이 백화산을 두고 독불장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오히려 점잖은 표현이다.
속리산에서 백두대간과 헤어져 구병산을 거쳐 팔음산(762m)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한껏 낮아졌다가 933m 높이의 백화산 포성봉으로 솟구쳐 오른다.
그 산줄기는 남남서로 달리다 다시 주행봉을 빚고 황간 어름에서 슬그머니 잦아 든다.

백화산맥이 상주의 모동면. 모서면. 옥천의 청산면 일대의 분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더욱 우뚝하고 커 보인다.
 백화산맥은 주봉이 지도에 포성봉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연유는 알 수 없으며 동국여지승람 등 모든 기록이 백화산으로 되어 있고 상주쪽에서는 한성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관이 아름답고 주위에 많은 명소를 가지고 있으며 유적도 둘러볼 수 있고, 계곡도 깊고 그윽하면서 산행이 그리 어렵지 않고 교통도 편리하여 고년의 등산객에게도 다주 좋은 산이다. 
 옛기록인 [상산지]에 백화산이 잘 소개 되어 있다.

 백화산은 중모현 서쪽에 있으니 상주에서 77리다. 기괴한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어 형용키 어려우며 산 아래 큰 내가 굽이돌아 남쪽으로 사담에 이르니 넓어지면 담동(潭洞)이 되고 흩어지면 필련(匹練.폭포)과 같으며 계곡 양쪽에 절벽으로 이루었고 절벽 사이에는 층층이 노송과 기이한 꽃들이 피어 일대 장관이다. 이라 했다.
 속리산 부근에서 흘러와 백화산 아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관통하여 달이 머물러 간다는 황간의 명소 월류봉을 스쳐가는 물이 석천(상주사람들은 구수천 또는 중모천이라 한다)이다.
 [상산지]의 표현처럼 이 석천은 특히 옥동서원이 있는 수봉리와 반야사 사이 협곡을 흘러 내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그래서 옛 선비 한 분은 백화산에 올라 신선이 오라고 손짓하니 백룡을 타고 청천에 오른다. 라고 노래했다. 
 옥동서원 뒤 봉우리인 옥봉 아래에는 백옥정이 있으며 용추골 들머리 위의 석천 냇가에는 세심석이 있어 옛 선비들의 풍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고려의 음악가로 이 곳에 살고 있었던 임천석(任千石)이 조선조 태종이 부르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자살한 임천석대,
 상주 황령사의 스님 홍지사가 몽고군 장수 차라대의 병졸들을 무찔렀다는 저승골, 몽고 잔병들이 통곡을 하며 넘었다는 방성재, 부처골, 물탕골, 명경대, 사담, 병풍석대, 난가대, 옥류대, 부처굴, 전투강변(점터강변), 산택정터 등 많은 명소들이 백화산과 바로 앞의 지장산(650m) 사이에 협곡을 관통하는 석천 물가에 있다.
 용추는 수봉리 신덕마을에서 백화산으로 가는 용추골에 있으며 맑은 물과 숲 그리고 바위들이 어우러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그 밖에도 식산 이만부(1664~1732)의 백화산 기행문인 [지행록]에 의하면 팔절탄(팔탄:여덟곳의 명소 또는 여울)이 있었고, 절터도 보문사터, 용문사터, 진불암터, 내원암터가 있으며 주위의 봉우리도 한수봉, 만경봉, 헌수봉, 샛별봉, 옥봉 등 고운 이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