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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물인생 50년....최종실

감칠맛.오늘 2007. 8. 18. 23:35

[한겨레] 농악단장 아버지 둔 ‘네살 신동’에게 ‘풍물은 내 운명’ 이었다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씨와 ‘사물놀이’ 신화 만든 지 29년
상모놀이·소고춤 달인 되어 내달 8일 대규모 기념공연 연다.

 

텅빈 공간에서 처음 소리가 생겨난다. “떵 떠덩 떵 떠덩…”. 소리는 이내 소리와 물고 물리며 리듬으로 바뀌어 동심원처럼 퍼진다. “떠덩 떠덩 쿵 떠덩…”. 귀를 파고든 울림이 심장 박동과 어울려 몸을 흔들어대더니 마침내 얼마저 빼놓는다. 어깨는 절로 들썩거리고 두 손은 자연스럽게 허벅지를 두들겨댄다.

“두드리면 열립니다. 문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세상이 열립니다. 저의 풍물잽이 50년은 세상을 향한 두드림이었습니다.”

상모놀음과 소고춤의 달인이자 1978년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씨와 더불어 ‘사물놀이’ 신화를 만들어낸 최종실(54·중앙대 국악대학 타악과 교수)씨가 풍물인생 50년을 맞았다. 네살 때인 1957년 삼천포농악계(현 삼천포농악단) 계장이었던 아버지 최재명(1978년 작고)의 손에 이끌려 삼천포농악단에 입단해 아버지 어깨 위에 무등을 타고 놀던 것이 어느새 50년 세월이 지났다.

그의 말대로 “풍물잽이는 처음부터 운명”이었다. 그가 태어난 송포(당시 삼천포시 송포동)는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된 진주삼천포농악(당시 농악12차)의 주류인 송포농악의 터전이었으며, 아버지 최재명은 벅구(소고)잽이들의 우두머리인 수벅구(상벅구)이자 꼭두쇠로 이름을 날렸다. 최종실의 맏형 최포돌(1987년 작고)은 송포동 바로 옆의 중림동 농악단에서 상쇠를 맡고 있었다.(최종실은 1953년 음력 12월14일에 태어났으나 호적에는 1년이 늦게 입적되어 1954년 12월24일 생으로 올려져 있다)

최재명은 8남1녀 중 일곱째 아들 최종석(60·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전수조교)에게 대물림하려고 상모돌리기를 가르쳤다. 그러자 네살박이 막내 최종실이 “나도 저것을 달라”고 울면서 보챘다. 상모를 주자 “신통방통하게”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이틀 뒤 아이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혼자 상모를 돌리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몰려와 “신동이 났다”며 최재명에게 상모돌리기를 가르치라고 채근했다.

최종실은 이듬해인 1958년 다섯살 나이로 공연에 정식 데뷔했다.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남민속경연대회에 참여한 삼천포농악단의 끝벅구로 출연한 것이다. 다섯살 애동은 수벅구인 아버지 최재명의 어깨 위에서 상모를 돌리고 소고춤 재주를 보여 관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정통 남사당패 마지막 꾼으로 활약했던 김복섭은 그 때 심사위원으로 참석해 최종실의 애기놀음을 보고 신동이라고 감탄했다.

“아버님이 수벅구였고 제가 끝벅구였어요. 어른들 하는 판에 끼어서 흉내내면서 풍물을 배웠어요. 공연 때마다 제가 하는 애기놀음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러면서 어느 공연에도 빠지지 않고 말그대로 판 속에서 자랐어요. 그런 세월이 벌써 50년이 되었네요. 저를 두고 ‘남사당의 후예’라고 하는 말은 ‘놀음판 속에서 배운 마지막 세대’라는 뜻일 겁니다.”

내년에는 그와 김덕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고 김용배(1986년 작고), 이광수(민족음악원 원장)씨 등이 사물놀이를 출범시킨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1978년 12월 서울 원서동에 건축가 김수근이 세운 공간 사옥의 지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남사당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네 청년의 풍물놀음이 열렸다. 북과 장고, 징, 그리고 꽹과리의 사물이 어울린 진기하고 신명나는 소리는 사람을 울리고 곧이어 세상을 울렸다. 젊은 타악연주자들의 공연에 반한 민속학자 심우성씨가 ‘사물(四物)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마침내 새로운 음악이 탄생했다.

“그해 9월 서울 국악예술중고교 출신 박범훈(중앙대 총장), 김영재(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최태현(중앙대 국악대학 교수) 선배님들의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공연이 있었어요. 당시 최태현 시나위 회장이 ‘사물악기로 앉아서 연주하는 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어요. 국악예술학교 1년 선배 김덕수씨와 저의 바로 위 형님인 최종석, 당시 남사당 단원으로 활동하던 김용배씨로 팀을 꾸려 첫선을 보였는데 그만 화제가 되어버렸어요. 자신감을 얻어서 연배에 맞게 종석 형님대신 남사당 단원 이광수씨를 영입해 다시 12월에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연주회를 연거죠.”

(참고로 사물놀이 형식의 첫 공연은 1978년 2월22일 원서동 공간 사옥의 지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서울국악예술학교 출신 이종대(부산대 국악과 교수) 최태현 김덕수와 남사당 출신 김용배가 북, 징, 장구, 꽹과리 등 사물로 한 ‘웃다리풍물’(경기·충청) 가락연주였다. 그러나 당시 연주는 이종대(피리 전공) 최태현(해금 전공) 등 비타악전공자로 급조된 것이어서 실질적으로 타악전문 연주자의 공연인 사물놀이로 평가받기 어렵다. 그 뒤 최종실이 참가해 최종석과 김덕수, 김용배가 팀을 이뤄 78년 9월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공연에서 손발을 맞췄고, 최종석 대신 남사당 단원 이광수가 영입되면서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사물놀이’ 패의 틀을 갖췄다.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은 1978년 12월 공간사랑의 연주를 통해 사물놀이를 일약 세계적으로 음악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물놀이는 1983년에 김용배가 국립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그 자리를 강민석을 영입해 활동해왔다)

 

김덕수씨와는 1964년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그의 표현대로 '숙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공보부주최로 열린 이 대회에서 그는 10살 나이로 삼천포농악단의 끝벅구로 출전했고, 충청 꼬마 명인 김덕수는 대전농악단의 끝장구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저의 아버님이 대전농악의 끝장구하는 놈을 잘 봐두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김덕수씨가 그의 아버님 김문학(작고)씨도 똑같이 말씀하셨다고 해요. 전국에서 날고긴다는 프로들이 나오는 대회에 꼬맹이들이 튀니까 그런 말씀이 나오신 거여요.”

그 숙명적인 만남은 두 사람이 한해 차이로 서울 국악예술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국악예술중학 시절 그와 김덕수는 국악예술고 2년 박범훈과 함께 학교 악기창고(현악실)에서 한솥밥을 지어먹고 마룻방에 잠을 자야 하는 자취생활을 하며 음악 동지로 우정을 쌓아나갔다. 경기도 양평 출신인 박범훈 총장의 말마따나 “3도 촌놈이 만나” 객지생활의 가난과 설움을 음악으로 달랬다. 박범훈 총장은 당시 “덕수와 종실이의 농악실력은 이미 프로였다. 국가의 행사를 비롯해 해외공연까지 훨훨 날아다니며 역량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종실이의 자반 뒤집기의 묘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하였다”고 회고했다.

 

최 교수는 사물놀이 30년을 맞는 내년에 “사물놀이의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공연을 꾸밀 생각이다. 원년 멤버 김덕수, 이광수씨와 고 김용배를 대신해 사물놀이 패에서 활동했던 강민석(49·중앙대 국악대학 타악과 강사)씨를 불러모아 3월부터 12월까지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 판놀음을 벌인다. “원년 멤버들이 여전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내년을 넘기면 더 어려워지고, 지금과 같은 기량을 내기가 힘들다”며 김덕수, 이광수씨를 설득했다. 사물놀이 원조 멤버들이 공식적으로 함께 공연하기는 1994년 ‘국악의 해’에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이후 14년만이다.

그는 “요즘 사물놀이 연주자들은 빨리만 패려고 한다”고 걱정하며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연주를 할 수 있는 기량을 쌓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물놀이는 신명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가 관중들을 울리고 다시 관중들을 통해서 연주자가 흥을 느낄 수 있는 구조의 음악이죠. 또한 어떤 틀 속에 악보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개성이나 당시 분위기에 따라 무한대로 펼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입니다.”

 

요즘은 8월에 그가 총연출을 맡은 두 가지 큰 공연준비에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먼저 오는 8월2일부터 5일까지 고향인 사천시 창선삼천포대교 공원에서 세계 9개국 11개 타악연주팀을 초청해 제2회 사천세계타악축제를 벌인다. 또 사흘 뒤인 8일에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그의 풍물인생 50년을 기념해 ‘최종실의 타악공연’을 준비했다. 그가 4년만에 갖는 개인 무대이지만 ‘월드타악’의 원류를 찾으려 세계 80여개국 순회공연을 포함해 국내외 3,000여회 이상의 무대를 누벼온 여정과 흔적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그룹인 중앙타악단, 여성타악단 쟁이, 송포사물놀이 등 국악 연주자 100여명이 참여하고, 브라질의 두두 투치, 일본의 야히로 토모히로, 우즈베키스탄의 아보스그룹, 가나의 파스칼 야오 영 등 5개국의 유명 타악기 주자도 초청했다.

“저에게는 농악 또는 풍물이라는 것이 나의 분신이자 나의 생활입니다. 농악으로 커왔고 앞으로도 농악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다음은 인터뷰 전문>

 

-어떻게 풍물을 하게 되었나요?

=아버님(최재명)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삼천포농악계 계장을 하셨습니다. 그때는 농악단이 아니라 농악계였어요. 그때 아버님은 꼭두쇠이자 벅구(소고)잽이들의 우두머리였던 수벅구였습니다. 제가 끝벅구였어요. 나이가 어려서 맨어린이들 끝에 서니까.

제가 8남1녀 중 막내인데 제 바로 위에 나이가 다섯살 많은 일곱째 형님이 있었어요. 최종석이라고 올해 예순인데 지금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전수조교로 있습니다. 아버님이 대물림하려고 그 형님에게 상모돌리기를 가르쳤는데 4살짜리가 나도 저것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가 할 수 없어서 안주니까 떼를 썼다고 해요. 아버님이 상모를 주니까 울음을 뚝 그쳤답니다. 이틀 후에 아버님이 보니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혼자서 상모를 돌리더라는 거여요. 동네 사람들에게 놀라서 다 몰려와서 그것을 보고 “신동이 났다”고 아버님더러 형님과 저에게 상모돌리기를 가르치라고 했대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50년입니다.

정말 어렸을 때부터 농악집단에 판에 끼어서 어른들 하는 것을 보고 흉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보면서 흉내를 내는 거여요. 그러다가 저 하는 놀음을 보러 사람들이 몰리고, 어느 공연에서든 안끼는데가 없이 판 속에서 자랐어요. 요즘 세대는 판 속에서 자라지 않고 학원에서 배우지만. 절더러 남사당 후예라고 하는 것은 놀음 판 속에서 배운 마지막 세대라는 뜻일 겁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일본에서 살다오셔서 모든 생각이 앞서가신 분입니다. 젊었을 때에 일본가기 전에 부락농악의 단원으로 계셨습니다. 귀국하셔셔 아버님의 역량으로 삼천포농악이 재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활동했던 때는 송포농악이었는데 송포농악이 남양농악이 되었고 또 삼천포농악으로 발전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상을 타고 하면서 1966년 농악 가운데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어요. 진주와 삼천포는 농악이 12차36가락을 치는 곳이기 때문에 지정받을 당시에 ‘농악12차’이었다고 합니다. 1986년에 진주농악으로, 1993년에 삼천포농악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전두환시대에서 들어서서 평택농악(85년), 이리농악(85년), 강릉농악(85년), 필봉농악(88) 등이 한꺼번에 지정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반대는 없었나요?

=아버님 하시는 일에 조용하게 뒷바라지하신 분입니다. 그 시대는 여자가 남자하는 일에 반대하지 못하는 시대였고 아버님이 그만큼 삼천포 농악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믿고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농악 혹은 풍물이란 어떤 것입니까?

=농악은 우리 민중의 신명을 돋워서 삶의 활력을 주는 우리의 민족의 전통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농악이라는 것이 하나의 생활이고 농악으로 커왔지만 농악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농악은 나의 분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농악을 하면서 힘든 것을 모르고 자라왔습니다. 나중에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농악에서는 여러 잽이(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기능자)들의 역할이 있는데 내가 맡은 상모놀이하는 잽이들이 활동영역이 크고 가장 힘들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장르는 피리 하나만 가지고 박수받고 하는데 저는 온몸을 던져야만 했습니다. 자반 뒤집기가 제 특기인데, 정말 고난도의 예술이 아닙니까. 그것도 행복한 불만이라고 하겠지만…. 어느 나라 어디가서라도 그 순간에는 박수가 나오는데, 나오는 강도가 다르지요. 예술의 살아있는 공감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 힘으로 그 신명으로 연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아버님께서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을 가르쳐주셨냐고 푸념을 할 수 있겠지요.

 

-김덕수씨와의 인연은?

=10살 때인 1964년에 공보부 주최로 열린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결선대회에서 서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경상도 대표 삼천포농악의 끝벅구로 나갔고 김덕수씨는 충청도 대표 대전농악의 끝장구 역할을 했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대전농악의 끝장구하는 놈을 잘 봐두라. 김덕수 아버님 김문학씨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왜냐하면 전국 프로들이 나오는 전국 결선대회인데 꼬맹이가 나온다는 것은 월등히 잘한다는 거 아닙니까. 꼬맹이들이 튀니까 그런 말씀이 나오는 거여요. 그때 제가 개인상을 받았습니다. 10살짜리가. 이 역사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상으로 광목 두필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어머니께서 제 농악옷을 손수 지으셔서 저를 입혔습니다. 7~8년 전부터 전국민속예술축제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데 올해 48회가 10월에 저의 고향인 사천에서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김덕수씨가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에 저보다 1년 먼저 들어갔다. 제가 국악예술중학교에 입학할 때 지금 중앙대 총장이신 박범훈씨가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고 김덕수씨가 중학교 2학년이었지요. 선생님 숙직실 옆에 있는 악기창고(현악실)에서 3명이서 밥을 해먹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한솥밥을 먹고 같이 고생한 인연은 .

박범훈 총장말로는 3도 촌놈이 만났다고 해요. 경기도 양평 촌놈(박범훈)과 충청도 대전 촌놈(김덕수)과 경상도 삼천포 촌놈(최종실)이 만난 거죠.

 

-사물놀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1969년에 박범훈(중앙대 총장), 김영재(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최태현(중앙대 국악대학 교수)씨가 졸업하면서 국악예술학교 출신들로 ‘민속악회 시나위’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졸업하면서 시나위에 타악이 필요해서 김덕수씨와 제가 타악 파트를 맡아서 활동했습니다. 1978년 시나위 정기공연을 앞두고 회장이었던 최태현 선배가 “사물악기로 앉아서 연주하는 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어요. 그때 김용배씨는 남사당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김용배씨를 불러들이고 제 바로 위 형님인 최종석씨와 4명이 공연을 했습니다. 9월에 공간사랑에서 시나위 정기공연의 한 프로그램으로 첫선을 보였지요. 그때는 이름이 없었다. 첫선을 보였는데 그만 화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저희들도 처음 있는 일인데 관중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당황하고 또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연배가 맞는 팀으로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이광수씨를 영입해서 12월에 공간사랑에서 다시 공연을 했어요. 그때 심우성 선생도 참여했는데, 선생님이 “사물놀이하니까 다른 이름이 뭐 있겠냐 사물놀이지” 라고 해서 사물놀이가 우리 팀 이름으로 되었습니다.(웃음)

 

-사물놀이 시절 주로 하셨던 연주는?

=어릴 때부터 상모놀음과 소고춤을 주로 했습니다. 사물할 때는 앉은반에서는 북을 쳤고, 선반에서는 징을 치면서 소고놀음을 했다. 소고놀음은 농악의 꽃이죠. 그것이 없으면 농악이 화려하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소고놀음을 할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자반 뒤집기가 가장 고난도입니다. 무대가 미끄러워서 실수한 적은 있지만 스스로 한 것은 없어요. 옛날에는 마당에서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상모도 따라 돌리기 때문에 오랫동안 훈련을 해야 했어요. 어지러워서 세상이 같이 돌아가면 안되고, 몸을 돌리면서 관중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모돌리는 것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사물놀이가 1부에 앉은반이 있고 2부에 판굿이 있었기 때문에 사물놀이가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상모돌리면서 연주하는 것은 세계에도 없어요. 정말 우리 조상들이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1987년 미국순회공연에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공연을 했는데 현대무용 교수가 우리 판굿을 보고 “저것은 상모 안에 모터를 장치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하는 것이다”고 하더군요. 그 여 교수가 너무 궁금해서 공연이 끝난 뒤에 분장실까지 찾아와서 “상모 안에 모터장치가 있지 않느냐”고 물어서 상모를 보여주니까 “판타스틱”, “그레이트”하면서 놀라워하더라.

 

-사물놀이를 하면서 가장 보람은

=82년도에 미국 댈러스에서 국제타악예술협회 초청으로 각국의 타악전문가들이 모두 참가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국대표로 공연했는데 공연 후에 기립박수가 30분이나 이어졌습니다. 커튼콜이 10번 이상 끊기지 않았어요. 7번째 무대로 나갈 때 네 사람 모두 눈에서 눈물이 나오더군요. 한국의 사물이 세계의 타악전문가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승리감이었습니다.

또 86년도 캐나다 뱅쿠버 세계엑스포 때 일입니다. 그 때 주제가 통신인데 통신의 가장 원초적인 것이 타악이라고 생각했던 것같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통신을 두드려서 했다는 것이죠. 부대행사로 세계드럼페스티벌이 열려서 세계 24개국이 참가했습니다. 그 나라 최고 타악주자가 모였어요. 그때 우리가 판굿을 했습니다. 무대 중앙에서 사물놀이를 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상모돌리면서 자반 뒤집기를 하면서 두드리니까 관중들이 경악을 해요. 다른 연주자들조차 놀라더군요. 한국 사물놀이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내년에 30주년인데 다시 옛날 모습을 볼 수 없겠습니까?

=사실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물놀이의 역사를 바로 잡아보자는 것인데. 김덕수씨하고 이광수씨에게 말했지요. “원년 멤버들이 여전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내년을 넘기면 더 어려워지지 않겠느냐”고, “더 늦어지면 지금과 같은 기량을 내기가 힘들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지요. 좋다고들 해요. 내년 3월부터 시작해서 전국투어하고나면 서울에서 장기공연을 할 생각입니다. 해외공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 12월 방학부터 연습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지금 아이들은 빨리만 패려고 하는데 몸에서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사물놀이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사물놀이의 매력은

=신명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가 결국은 관중들을 통해서 연주자가 흥을 느낄 수 있는 구조의 음악입니다. 리듬 음악이기 때문에 가장 원초적인 음악세계가 연주자를 통해서 어떤 짜임새 없이 무한대로 펼쳐나갈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틀속에 악보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개성이나 당시 분위기에 따라 무한대로 펼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재즈음악 연주자와 협연을 많이 했어요. 즉흥음악성이 강하기 때문에.

 

-사물놀이를 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충고는

=사물놀이는 몸에서 우러나오는 연주를 해야지만 관객들에게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부터 연주할 수 있는 기량을 쌓아야 한다.

 

-가족들 중에서 예술쪽에 활동하는 이는?

-집사람(이미화·53)가 한국 무용을 전공했어요. 지금 중앙대 타악과에 출강해서 무용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딸(지희·22·중앙대 음악극과4)은 중앙대에서 한국뮤지컬을 전공하고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타악을 배워서 웬만한 것은 다 다룹니다. ‘뜻 지’ 자 ‘빛날 희’자라는 이름은 ‘아빠의 뜻을 빛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경기도 안성과는 어떤 연고가 있는지?

=2000년에 박범훈 총장님이 국악대학을 만들려고 하니 타악과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안성을 처음 내려왔습니다. 2001년에 국악대학과 타악과를 만들어 서울에서 출퇴근하다가 2003년에 아예 안성으로 이사와 살면서 학교일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또 2001년부터는 안성 남사당바우덕이축제 예술총감독을 맡고있습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바램은

=사물놀이하면서 많은 창작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새로움을 창출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죠. 시대 흐름에 맞는 타악세계를 펼칠 생각입니다. 세계 타악에 관심가지고 제자들을 데리고 15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타악기를 모이기 시작해서 1,000여점을 모았습니다. 세계타악기박물관을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마지막 소원입니다.

 

-오는 8월8일에 풍물인생 50년을 기념해 ‘최종실의 타악공연’을 올리는데

=그 공연은 하루 아침에 된 일이 아닙니다. 15년 동안 작업한 결실을 50년 기념공연으로 다 펼치는 무대입니다. 아참, 2일부터 5일까지 제 고향 사천시 창선삼천포대교 공원에서 사천세계타악축제가 있습니다. 지난 6~7년간 공무원들을 상대로 쫓아다니면서 설득해서 지난해 1회 대회를 열었더니 참석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올해 2회째인데 세계 9개국 11개 타악연주팀을 초청했습니다. 사흘 후에는 또 제 기념공연도 있고요. 요즘 같아서는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정돕니다.

 

-타악세계를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아끼는 제자들은?

=98년에 송포사물놀이를 만들었습니다. 이광수 선생이 제 아호를 고향 이름을 따서 송포라고 지어주었어요.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3~4학년부터 제 문하에 들어와서 배웠습니다. 지금 나이가 25~26살이 되었습니다. 꽝과리는 임재정, 장구는 한성원, 북 이정우, 징은 이강일이 맡고, 소고놀음은 하진수, 강성현이 합니다. 이 제자들이 제 뜻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두드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세계가 열리고, 세계가 보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출처 :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구리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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